관람일: 20070303, 19:00
CAST: 김도현 일두/이두, 양준모 짝귀, 구원영 마담, 이신성 태풍, 이찬미 희진, 박성준 할아범
조광화 작/연출, 원미솔 음악감독
천사의 발톱 프로그램 북, 핸드폰 고리, 그리고 예당 토월극장 티켓.
원래 프로그램 이외의 관련상품은 잘 안 사는데, 판매하는 아가씨가 유난히 가녀린 목소리로 "핸드폰 고리 같이 하시면 만원인데요..."하고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헛웃음이 나와서 함께 구입했다.
제안 직후 새로 세팅한 노트북 정리하고... 피곤해서 왠만하면 쉬고 싶었는데 평이 하도 좋길래 무리해서 외출했다. 대체 얼마나 훌륭하길래 이리 악평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공연이 일주일만 더 했었더라도 이번주에 안 나갔을 터인데, 일욜이 막공이어서 막공을 피하다 보니 토요일밖에 시간이 없었다. -_-;;
안그래도 우울한 내용이라던데 이 상태로 제대로 볼 수 있겠나~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나중에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외출을 강행.
공연 시작 전에 왠 늘어지는 팝송을 틀어준다. -_-; 당황. 원래 넘버 틀어주거나 하는 거 아녔낭. 오케스트라 피트는 비어 있고, 그 공간이 가끔 배우들이 이동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용하는 경우는 처음 봤음.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분이 나빴다.
이건 남성 판타지다. 남성향 포르노 소설에서 따온 것 같은 여성 캐릭터가 특히 거슬렸다.
지난 일요일로 막을 내렸으니 일단 내용 누설에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 이야기쇼에서 왜 자꾸 이걸 지킬&하이드를 들먹이며 이야기했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공연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되더라. 이 극의 설정은 A가 B인척 꾸미고 사는 거다. 모자와 안경을 쓰면 B가 되는 게 아니라, B인 척하는 A로 존재한다는 거지. 그럼 혼자가 되었을 때나, 모든 걸 알고 있는 할아범과 있을 대는 B 흉내를 내는 A라는 모습이 보여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그게 보이지 않는다. (할아범과 있을 땐 무엇보다 죄책감 때문에라도 A의 흔적이 보였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말야) 겉모습은 B지만 실상은 A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여자애의 한 마디, "가끔 무서운 얼굴이 보여요" 뿐이다. 대사로 한 줄 집어넣으면 뭐하냐고. 실제로 그런 A의 모습을 안 보여 주는데~ 그래서 B인척 하는 걸 그만두는 A가 아니라, B에서 A로 변신하는 모습이 보이는 거다. 그러니 지킬을 떠올리지. -_-;
- 사실 저 할아범도 수상한데, 철 기술자인걸로 봐서 원래 일두 편이었던 것 같은데, 나서서 일두의 시체를 용광로에 밀어넣고 그 뒤에도 입을 다물고 이두를 지원한다. 나레이터로서의 역할도 일부 맡고 있는데, 저건 아니지. 대체 왜 이두 쪽에 서는지 납득이 전혀 안 되잖아.
- 중요한 키가 되는 여자 캐릭터인 희진. 이찬미씨는 이야기쇼에서 "왜 희진이 이남자 저남자 한꺼번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는데, 내가 볼 때 저 희진은 남성향 소설에서 쏙 빠져나온 존재다. 어리고, 섹시하고, 또래의 남자애부터 아버지뻘 되는 남자까지와의 육체적(!) 사랑에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갈구하고), 남자의 일에 능력적으로도 도움이 되고, 마지막엔 조용히 사라져 주는 존재. 뭐 이딴 게 다 있냐... "난 별 생각 없었는데 그게 한 남자애를 죽게 만들었어" 하고 외치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저 아저씨 호구야"라며 몸으로 꼬실 생각을 하는 여자애. 이게 사연을 가진 다른 남자 캐릭터들과 동등한 인간 캐릭터일 수가 있는 걸까?
- 이렇게 삐딱하게 보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초반에 서대횟집 "아줌마"가 일두를 쫓아다니는 걸 일두(인 척하는 이두)가 거부하면서 10대인 희진을 보고는 "이 나이에 저 애와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아줌마의 사랑은 사랑도 아닌 건가? 왜 아저씨의 사랑인데 여자"애"와만 해야 하는 거야? 왜 그것만 사랑이라고 하는 거지? 이 때부터 마음이 꼬였다. -_-;
- 태풍은 일두가 희진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알았다면 함께 떠나지 않았을 거다 라고 하소연한다. 40대 아저씨가 10대를 사랑한다는데 그게 안 이상해? 사랑하니까 괜찮아야? 그럼 네 사랑은? 혹시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넘길 수 있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물건 다루듯 하는 거잖아.
- 이두는 희진에게, 태풍을 버리고 일두에게 가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끌린다는 반응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이미 중년. 너는 소녀". 일두/이두는 쌍둥이다. 자기와 같은 나이의 일두에게 보내려고 하면서 나는 중년이니까 안된다라고? 이게 말이 되나? 정말로?
이런 내용 구성을 보고 있으려니까 정말 기분이 나빠졌다. 뭐 이런 심한 남성향이 다 있어. 10여년 전 영화 나쁜 남자라든가, 그보다 좀 더 전에 유행했던 **남자 책을 읽고 난 후의 기분 나쁨과 비슷하더라. (강한 조폭 남자와 이용당하는-적어도 내가 보기엔- 여자들이 잔뜩 나왔던 류의 소설. 한동안 이런 소설이 대중소설 베스트셀러를 쓸어가던 시절들도 있었다.) 아직도 이딴 걸 들고 나온단 말이냐. 그리고 이딴 거에 열광하는 여자(!) 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인 거야...
- 말이 많았던 후크와 웬디 장면. 난 디즈니에 오염됐던 걸까? 후크와 피터팬이 여자 웬디가 아닌 웬디엄마를 원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차라리 팅커벨이 여자에 가깝지 않나? 질투도 하고.) 웬디를 섹스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걸 보니 그것도 불편했다. -_-;;
전체적으로 참 찜찜하게 감상해서, 커튼콜 때 속으로 제발 기립하지 마! 앞줄에 혼자 기립 안하려면 쪽팔리잖아! 하고 계속 하소연하고 있을 정도였다. -_-; (기립은 있었지만 다행히 앉아 있는 사람도 꽤 되어서 끝까지 버틸 수는 있었다.)
하소연은 여기까지 하고 연출이나 극의 성향을 빼고 이야기하자면...
토월이 큰 무대가 아니기는 하지만 허전한 곳 없이 무대도 잘 사용했고, 배우들도 대체로 좋았다. 단지 발성에 문제가 있는지 가사전달력이 전체적으로 약했음. 특히 앙상블은, 춤이 역동적이었는데 춤에 집중하느라 그랬는지 노래를 거의 못알아먹게 부르더라. -_-;
용광로(?)에 일두를 밀어넣는 장면은 매우 훌륭. 그 앞뒤가 말이 안되어서 그렇지. -_-;
이야기쇼에서 이미 불렀던 몇 곡의 노래들과, 어둠의 경로(-_-)에서 받은 1막 엔딩곡으로 이미 중요한 노래들을 다 알고 가서 노래엔 더 감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군. 1막 마지막 김도현씨의 노래(질투)는 정말 훌륭했다. 이 목소리 들으려고 오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 외에는...
뭐, 배우들이 연기를 못했다거나 노래를 못했다는 건 아니다. 다들 잘했다. 그러나 극의 성향 자체를 눈감아줄만큼은 잘하지 못했다는 게 내가 점수를 주지 못하는 이유다.
짝귀 역의 양준모씨도 기억에 남긴 했는데, 좀 힘이 딸리는 듯해서 아쉽더군. 글구 그 "짝귀" 분장 좀 신경써서 해 주지. -_-;;
태풍 역의 이신성씨는 폴인러브에서 처음 봤었는데... 그 때 노래가 있긴 했나?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은 안들었는데 좀만 지나면 까맣게 잊을 것 같다. 폴인러브 때처럼-_-;
마담 역 구원영씨는 살인사건에서 처음 봤었고. 음.. 뭐 이분도 잘하긴 하는데 별 감흥은 없었네.
짝귀의 20년, 이두의 질투, 그리고 전체적으로 몇 번 reprise되었던 "사라질까 두려워"가 인상적으로 남았던 곡들.
참 불편했기에 (그리고 1막에서 마담과 태풍의 씬에서는 심지어 조금 졸기까지 했다. -_-; 남들은 1막이 긴박하고 잘 짜여져 있다고 하더만 난 졸릴 정도였으니-_-; 정말 성향이 안 맞았나 보다) 집에 오는 동안도 내내 찜찜했던 공연. 요즘도 이딴 식이 통한단 말야? -_-;
커튼콜 때 배우들한테 정말 미안해 죽겠는데 도저히 박수치고 싶은 기분이 안 든 공연도 진짜 오랫만이네.